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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영혼에 대한 생각들...

순전한 기독교 (1장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by Lim-Ky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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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 CS 루이스



1. 인간 본성의 법칙

  • 사람들의 대부분의 행동은 사실 어떠한 기대에 의한 행동을 하거나, 만약 기대에 미치지 못한 행동을 했을때 그 기대라고 말하는 기준에 대해 왜 미치지 못했는지 해명하는 형태의 양식을 따릅니다.
    즉, 사람들 행동 이면에는 어떠한 기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기준은 행동에 대하여 이 행동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일종의 합의입니다.
  • 사람들은 이러한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 혹은 규칙을 ‘자연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자연법을 보통 중력법칙이나 유전법칙, 화학법칙 등을 가르켰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사상가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 즉 자연법이라고 부른것은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 신체는 중력 법칙에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수 없어도 인간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인간 본성의 법칙은 인류 전체에 대한 공통 양식을 뜻합니다. 또한, 지역마다, 문화마다, 나라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쉬운 예를 들어, 2+2가 5가 될 수 있고 6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2+2는 4라는 명백한 진리에 대한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사람들은 이 명백한 진리 또는 규칙에 대해 누구나 인정하며 그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맞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연법(올바른 인간 본성)을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 요약하면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누구도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연법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고 있습니다.

2. 몇 가지 반론

  • "당신이 말하는 도덕률이란 사싱상 인간의 집단 본능에 불과한 것으로서, 다른 본능들처럼 발전한게 아닌가?" 라고 반론한다면,
    여기서 필자는 본능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필자는 본능 너머의 본능을 선택하는 또 다른 제3의 본능을 지휘하는 지휘자를 뜻합니다.
  • 만약 위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당신이 본다면 당신은 2가지 욕구를 느낄 것인데, 하나는 그 사람을 도우려는 욕구요. 다른 하나는 위험을 피하는 욕구입니다. 여기서 제3의 내면의 소리가 있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도우려는 욕구를 북돋으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처음 2가지 욕구를 단지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2가지 욕구 중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선택을 하게하는 기준과 목소리는 어디에서 온 것이며 필자는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 마치 어떤 키를 눌러야 하는지 지시하는 악보가 곧 피아노 건반 키 가운데 하나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덕률은 우리가 연주해야할 곡이라면, 본능은 단지 건반 키들에 불과합니다.
  • 또 하나의 근거로 만약 인간의 마음속에 두가지 본능만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두가지 본능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 반드시 강한 본능이 이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덕률을 가장 선명하게 의식하는 순간 보통 약한 본능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돕는 편보다는 자신의 안정을 도모하는 편을 더 바랄 것입니다.
  • 그런데 그래도 그를 도와야 한다고 내면의 목소리는 외칩니다. 도덕률이 옳은 충동을 원래보다 더 강화시키기 위해 애쓰라고 할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즉, 한 본능이 다른 본능보다 강화시키려 드는 행위는 분명 본능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본능 너머의 무언가가 말해주는 것이지요. 마치 키보드의 키가 다른 키보다 자기를 더 강하게 치라고 지시할 수 없듯이. 키 자체는 존재할 뿐 키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키보드를 치고하 하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 세번째로 도덕률이 단순히 본능 중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만약 도덕률이 본능 중 하나라면, 언제나 선하며 언제나 옳은 행동 규범에 일치하는 충동 하나를 우리의 내면에서 짚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본능이 항상 선하고, 어떤 본능은 항상 나쁘다 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본능을 선택해야합니다.
  • 즉 본능 자체는 나쁜 것이 원래 아닙니다. 피아노 건반에 옳은 키와 그른 키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키는 옳게 눌리는 순간도 있고, 그르게 눌리는 순간도 있습니다. 도덕률은 본능들을 지휘하며 일종의 곡조(우리가 '선'이나 '옳은 행동' 이라고 부르는 곡조)를 만들어 내는 어떤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이런 도덕률은 교육을 통해 우리에게 주입된 사회적 관습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라고 반론한다면, 이 점에도 오해가 있습니다. 구구단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구구단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사막에서 혼자 자란 아이는 구구단을 모를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구구단이 단지 인간의 관습, 즉 인간이 스스로 구성해낸 것으로서 인간이 원했다면 얼마든지 달리 만들 수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누히 말했지만 이 도덕률은 관습에 의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변치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우주 어느곳에서든 모든 존재들에게 관통하는 동일한 법칙입니다.
  • 또한 도덕적인 기준의 차이를 내세워 애초부터 도덕법(=도덕률)이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 도덕들간 차이를 인간이 알기 위해선 나의 마음속 하나의 기준이 자리잡고 있어야만 차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차이를 안다는 것은 어떤 기준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 즉, '기준'이 있어야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3. 이 법칙의 실재성

  • 인간에게는 두가지 기이한 일이 있는데, 첫번째 인간은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행동, 즉 공정한 처신이나 예의나 도덕이나 자연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종류의 행동이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두번째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 필자는 이 두가지 일이 기이하다고 말하면서, 기이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단순히 ‘사실’ 로써 느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함정에 빠져있다고 말합니다.
  •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왜 이런 법칙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이죠.
  • 다시 말해, 어떤 것이 불완전하다는 생각,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 할 모습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이 생각이야말로 중요한 개념이며, 이 개념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 첫번째 이 법칙은 단순 사실이 아닙니다.
  • 엄밀한 의미에서 진짜 법칙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표현법에 불과합니다.
  • 예를 들어, 돌을 위로 던지면, 돌은 다시 중력법칙에 의해 땅으로 떨어집니다. 돌이 내가 떨어질지 말지 생각하고 떨어지는 것을 택하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단순히 돌은 중력법칙을 따른다. 라고 말합니다. 즉, 이 현상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즉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과는 별도로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일에 관한 법칙이 따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법칙이 적용된 현상을 표현한 것일 뿐 실재를 알 수 없다.)
  • 하지만, ‘인간 본성의 법칙’이나 ‘바른 행동의 법칙’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이 때의 법칙은 ‘인간이 실제로 늘 하는 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 = 사실만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 이때에는 인간은 마땅히 해야할 일이 있지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고(자유의지가 있다는 증거) 다시 말해 인간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현실의 사실들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끼어듭니다.
  • 즉, ‘사실’만 가지고선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발을 걸어 넘어졌다고 합시다. 발을 건 사람에게 화를 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실수로 그랬는지 고의적으로 그랬는지에 따라 우리는 그사람에게 화를 낼수도 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발을 건건 사실이지만 그 사실 너머의 그 사람의 의도까지는 우리는 연관지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물론,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만을 가지고서 옳게 느끼거나 그르게 느끼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받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풋볼을 왜하는가? 하는 질문에 점수를 따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그 대답은 경기 그 자체일 뿐, 경기를 하는 이유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답은 사실 “풋볼은 풋볼” 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옳은 말이지만 도움이 되지 않으며 진리에 한걸음도 가지 못합니다.
  • 즉, 사실로 꼬리를 무는 행위로는 도저히 사고의 진보를 이룰 수 없습니다.
  • 따라서, 우리는 한 종류 이상의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으며, 우리가 만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압박하는 실재적 법칙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까지 이르게 됩니다.
  • 인간은 사실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발을 걸었다는 사실만으로 발을 건 사람에게 화를 낼 수 있지만, 화를 내기 전에 실수로 그랬는지, 일부로 그랬는지 사실에 대한 목적과 의도를 알면, 화를 낼 수도 내지 않을 수 도 있기 때문입니다.

 

4. 이 법칙의 배후에 있는 것

  • 그럼 이 사실 너머의 있는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요?
  • 크게 유물론적 관점과 종교적인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유물론적 관점은 물질과 공간은 우연히 생긴 것으로서 늘 존재해 왔지만 그 존재 이유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억년에 거쳐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우연의 연속으로 인하여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설명하죠.
  • 종교적 관점은 우주 배후에는 ‘정신’과 비슷한 무언가가 지각과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선호하는 존재입니다. 그 무언가는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모르는 목적을 위해 또 부분적으로는 어쨋든 자신과 닮은 존재를 만들려는 목적을 위해 이 우주를 만들어 냈다고 설명합니다.
  • 한편 과학적인 실증 방법으로는 종교적 관점을 증명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면 과학은 현상에 대한 관측과 측정만 할 수 있으며, 그 사실에 대한 설명만 할 수 있지. 사실에 대한 의도나 목적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이 난감한 상황에서 유일한 과학적(?) 증거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간)입니다. 인간은 자신 이외 모든것을 측정할 수도 있지마, 사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나의 자아와 존재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 정리하면, 우리는 우주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우연히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게 만든 힘이 배후에 있는지 여부를 알고 싶습니다. 만일 그런 힘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 힘은 관찰 가능한 사실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사실들을 만들어 낸 실재이므로 단순한 사실 관찬을 통해서는 찾아낼 수 없습니다.
  • 예를 들어 건축가가 집을 지었다고, 건축가가 그 집에 벽이나 난로나 카펫일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집안에서 살아가면서, 집 안에 구조나 물건에 대한 용도를 생각하고 건축가의 의도를 감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즉, 이미 나라는 인간에게 그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그 목적과 의도를 감히 알 수 있는 센서가 탑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 즉,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는 센서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누군가는 이 센서에 전원을 키지 않았거나, 누군가는 전원을 킨다하여도 감도가 약하거나, 누군가는 예민한 감도로 이 법칙 배후에 있는 존재를 느끼며 삶을 동행하거나…..

5.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 인간이 우주를 직면할때 엄청난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자비한 공포를 느끼기도 합니다.
  • 다른 말로, 완벽한 선이 존재하고, 그 존재가 완벽한 선으로 우주를 다스리길 바라는 기대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그 완벽한 선을 지키지 못함을 알기 때문에 인간은 두렵습니다.
  • 우리는 끔찍한 곤경에 처해있습니다.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고, 반명에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매일 그 선의 원수가 되는 셈입니다.
  • 다음날이라고 해도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없습니다.
  • 즉, 인간은 선 없이 살 수 없고, 그 선과 더불어 살 수도 없는 모순이고 멸망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 이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정말이지 이걸 진정 깨닫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기독교는 어떤 메시지도 전할 수가 없습니다.
  • 다시 말해, 사도바울이 했던 오호라. 나는 깨달았다. 내가 곤고한 자임을 누가 이 사망에서 나를 구하랴..했던 이 고백에서 부터 기독교는 진정 시작됩니다.
  • 즉, 불안함의 근원을 찾으면 우리는 그때야 비로소 살아갈 방법을 찾게 됩니다.

 

끝으로, 이런 절대적인 도덕률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시대에 위협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각 개인이 각자의 입맛대로 진리를 해석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기준을 정의 함으로써 각자가 개인화된 ‘신’으로써 세상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서로간 그 기준을 인정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이것은 우주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인 것입니다. 모두가 기준(신)이 될 수 없습니다. 점심시간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거나, 각자 취향대로 옷을 입는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준은 인간 존재 이유, 존재의 목적, 행위의 옳고 그름, 선과 악에 구별 등에 대한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기준에 대해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은 우주 전체에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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