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y Image
사색/영혼에 대한 생각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Clive Staples Lewis) 해설

by Lim-Ky 2024. 12. 22.
반응형
스크루페이프의 편지 - cs 루이스


1번째 편지(만물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논증적인 것은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와 진리는 가장 과학적이고, 논증적이다.
→ 실제로 많은 물리학자들은 신을 믿게된다.
사물의 본질을 알기 위해 깊게 사색할 수록 하나님을 알아야 함을 알게 된다.

따라서, 사탄은사물의 본질을 겹겹히 덮고 있는 껍데기(전문용어, 사회학, 피상적, 현상, 허구의 경제)만 바라보게 해야한다. 그곳에서 인간들이 헤어나오지 못하게 해야한다.

예전 인간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해서, 그리스도의 진리가 논증적으로 입증이 되면 구원받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것 자체를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논증거리를 계속 양산하고 본질을 안보이게(복잡성을 높여서) 하여 시선을 분산시켰다.

이성(=옳고 그름을 알 수 있는 이치)이 진정 깨어나서 진짜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결국 이성을 너머 영성을 보며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임을 사탄은 경계한다.


2번째 편지(실망감을 허락하시는 이유)
지금의 교회는 악의 세력의 일조하는 수준 낮은 교회다.
진정한 교회는 영원의 뿌리를 두는 교회이나, 그런 교회는 드물다.
우리가 흔히 이상적으로 그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경우, 발생되는 여러 실망감들을 이용해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실망감을 허락하신다.
실망감을 느끼면서 우리 스스로가 생각한 합리성 그리고, 나만의 벽돌로 쌓은 성을 중단하시길 바라신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허락하시어, 완벽한 사랑을 이루고자 하심이다. (연민적 사랑이 아닌 동등한 관계에서의 사랑과 원칙이 동일)
우리는 우리의 위선적, 공리적, 우월성이 아닌 하나님으로 부터 ‘진짜 겸손’을 배워야 한다.


3번째 편지(현실을 등한시하게 하라)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등한시한 채 가장 어렵고 영적인 의무에만 마음을 쓰게 하라.
현존하는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으로 감내하고, 진정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명백한 것을 무서워하며, 소훌히 하는 인간의 특성임)
우리에게 쪄들어 있는 일상적 언어를 통해 오해를 일으킨다. (잔소리, 말투)
예를 들어 분명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음에도,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현실적인 조치는 없이 영적 상태만을 노심초사하면서 영적인 기도만 한다.
현실적인 문제들은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 어긋난 영적 행위만 하는 상태를 이끌어내는 것아닐까.
(즉, 펜은 손에 잡지 않으면서 글씨가 써달라고 기도하는 행위)


4번째 편지(가장 원초적인 상태에서의 영적 교제 그리고 영적세계를 인식하느냐에 대한 전쟁)
진짜 벌거벗은 영혼으로 기도하는 원초적인 상황을 이끌어주실 하나님의 열심에 기대하자.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의 대한 영적 전쟁


5번째 편지(악의 진영에서 진짜 고난과 전쟁은 큰 틀에서 불리하다.)
영적싸움에서 고통,고난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 ‘축복'이다.
고통,고난은 ‘죽음’을 환기시킨다. ‘죽음’에 대한 환기는 ‘악’의 진영에서 사탄에게 있어 불리하다.
고통,고난은 자아보다 고귀하다고 믿는 가치와 명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한다.


6번째 편지(걱정을 심어 현재를 살지 못하게 한다. 객관적 시선을 갖지 못하게 결합시킨다.)
하나님은 현재 존재하는 일에 집중하시길 바란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십자가로 지라고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인간은 수십가지 미래에 대한 경우를 헤아리며 모든 운명에 대처하려고 한다.
그럴땐 하나님도 크게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신의 존재 자체 ↔ 자신의 심리상태의 체인지를 잘 활용해야 한다.

사탄의 전략은 2가지이다.
- 인간이 부정적인 상태가 되면 외부로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여, 아무 자각 없이 심리상태를 느끼게 한다.
- 인간이 긍정적인 상태가 되면 내부로 심리상태를 더 집중시켜 경건의 모양만 계속 갖추게 한다.

가상의 희생양을 향한 신파조의 공상적 증오를 이끌어 낸다. (악의는 실체적으로, 선의는 공상적으로)


7번째 편지 (악이 물질적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와 정치적인 명분과 기독교를 결합하여 인간을 타락시키는 법)
‘악’의 영들은 직접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 자신의 존재를 숨긴채 활동하는 것에 더 큰 이점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 ‘악’을 정말로 직접 대면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신’을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검은사제들' 이라는 영화 초반 한 신부의 대사이기도 하다.)

인간은 개인의 가치보다 수준 높은 ‘대의’라는 고귀한 가치 자체에 오히려 함몰되어 점점 더 ‘파벌’과 ‘독선’으로 폐쇄적인 조직이 되어간다.
진정한 기독교적 교리를 형식적인 종교화 작업을 계속하여 원래 목적과 본질을 훼손시키고 처음에 무얼하려고 했었는지 잊어버리게 만든다.
또한, 정치적인 대의명분을 기독교적 교리로 부터 찾게하여 기독교를 대의명분 수준으로 절하시킨다.
그로 인해, {기도,사랑, 성례} 보다 운동, 팜플렛, 대의명분, 강령, 개혁운동을 중요시여기게 한다.


8번째 편지(영혼과 육으로 구성된 인간의 모순적 특징과 이를 허용하신 이유와 진짜 목적)
인간은 육영혼이 결합된 존재이다.
‘영’은 영원한 대상을 갈망하며,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
‘육’은 시공간에 제약을 받으며, 기복이란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는 ‘기복’이란 사이클이 존재한다.

흔히 우리가 인생을 산으로 비유했을때 인간의 삶은 골짜기가 있고, 꼭대기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기복이 자연스러운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기복이라는 육적인 변동성에 영향받기도 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셨나)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꼭대기만 허락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먼저 신과 인간이 완벽하고 성숙한 수준의 교제와 사랑과 믿음을 나누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신뢰와 설득과 이해가 동반되어야 하며, 일방적인 제압에 의한 관계형성을 하면 안된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를 허용하시면서 우리의 자발적 자유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를 형성하길 바라신다. 또한 특별히 사랑하는 존재에겐 더 깊은 골짜기를 허용(그 한 영혼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속하게 하시기 위함임)하시며 그 고난 가운데에서도 메마른 기도를 올릴때 즉 ‘공리적’(무슨 일을 생각하거나 행함에 있어, 그것이 얼마만큼의 이익이나 효과가 있을 것인가를 중심으로 하여 생각하는(것))이지 않는 원초적인 영혼의 기도를 올릴때 진정 그분이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과 연합한 존재는 그 존재만의 고유한 특징을 유지한채 우주에 신의 숨결이 뻗혀나가듯이 뻗쳐나간다.


9번째 편지(고난가운데 있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다양한 방법)
골짜기를 지나가는 시점은 영혼이 가장 메마르고 건조한 상태이다. 이때 인간이 올리는 기도일수록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지만, 동시에 영혼을 흔들기에 좋은 타이밍이기도 하다. 골짜기에 지나갈때 그분이 허락한 시기와 방법이 아닌 올바르지 못한 형태의 ‘쾌락’을 즐기도록 유도하여 인간을 타락하게 만든다.

또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인간에게 지혜가 들어올 수 없게끔 막아야 하며, 기복원리를 인지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복원리를 인지하지 못하게 함은 한번 받은 은혜가 영원하다는 생각과 영혼의 건조함 역시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든지 기복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부분인데도 말이다. 이렇게 오해를 사게 해논 상태에서는 인간의 유형에 따라 다음과 같은 작전을 취할 수 있다.

쉽게 절망하는 비관형
→ 참된 크리스찬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과거의 감정에 파묻혀 있게 한다.

낙천주의적 인간형
→ 현재 침식된 영적 상태를 묵인하게 하고, 중용을 지키자는 마음으로 적당하게만 영적 열심을 다하게 만든다.

그리고, 정면으로 골짜기에 대해서 타락시킬 방법은 이 골짜기를 ‘단계’ 라고 인식시키고, 이 단계들을 빠져나온 자신에 대해 우월감을 심어주며, 생색내게끔 유도하고 허영심 느끼게 한다.


10번째 편지(세속적인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림을 통한 영혼의 잠식)
경건할 것 같은 인간을 경박함과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들을 붙여 그들과 어울리게 하면서 자신도 그들과 같이 행동하게 하며 계속해서 눈치를 보게해라. 그리하여 무늬는 그들을 흉내내다 결국 생각마저도 그런 피상적인 사람들의 부류로 전락하게 만들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경건함을 잃지 않는다면, 영적세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부터 자신은 구별되었다는 특별함과 허영심 그리고 우월감을 느끼게 하여 교만으로 가게 하며, 경건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반성보단 자신은 양쪽세계를 이해하는 것에 대한 자기만족을 취하게끔 미혹해라. 또한, 세속적으로 어울리는 그들에게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것보단 적당히 반응해 주는 것이 낫다라는 생각을 주입하여 청승맞게 청교도적인 생활을 하는것 유별나다라고 생각하게 하라.


11번째 편지(경박함으로 인간의 운명과 참된 진리에 대해 장난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진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야할 때, 경박함을 통해 이를 파괴해버린다.

그러니까, 인간을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이야기를 심각해야 해야할때 농담조로 받아치게 만든다.이런 경박함은 다른 웃음의 근원들과 다리 위험요소가 전혀 없고, 그렇기에 기쁨과 한참 떨어져 있는데다가 지성의 날을 날카롭게 하는 대신 무디게 만들며, 그렇다고 함께 경박하게 웃는 인간들 사이에 애정을 돈독하게 만들어 주지도 않는다.


12번째 편지(현실로 부터 오는 영적 괴리함, 불편함을 역이용해서 인간을 진리로 부터 멀어지게 한다)
인간이 ‘진리’로부터(’신’으로 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끔 해야하며

자신이 선택한 것들은 얼마든지 취소 가능한 사소한 것임을 주입시켜 방심하게 만들어야 한다.

모양만 있는 그리스도인이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자신을 보며 생기는 괴리함. 이 불편한 마음을 적당히 유지해서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이 되게끔 해야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인간을 너무 불편하게 만들면 자칫 진정으로 자신을 회개하면서 정신차리게 되기 때문에 게임은 끝난다. 따라서, 적당히 불편함을 느끼게 유도해야 한다. 또한 신을 생각할 수록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느끼는 마음을 불편한 마음으로 인식하게 하며, 이 불편한 마음 때문에 최소한의 한도 내에서 신을 생각하지 않게끔 만들어야 한다.

한편, 인간에게 쾌락을 적절히 제공함으로써 쾌락을 습관화 되게 하고 습관화된 쾌락은 점점 시시해지게 되는데 이를 활용해서, 마치 쾌락으로 인한 죄 또한 시시한 것 처럼 느끼게 유도한다. 그래서 인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며, 죄에 대한 예민성을 점점 무디게 만들어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위치가 아주 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신으로 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만든다. 이것은 사소한 죄라도 그것을 조금씩 쌓여 인간을 ‘빛’으로 부터 어둠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조금씩 조금씩 끌고오는 작업이다. 사실 가장 안전한 멸망의 길은 한 걸음 한 걸음 편하게 오게끔 만드는 것이며, 그것은 경사도 완만하고 걷기도 쉬운데다가, 갈랫길도,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는 길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요한계시록 3장 15절***


13번째 편지(진정한 쾌락과 진정한 고통을 느끼거나 알게 하지 마라.)
‘나' 라는 고유한 정체성으로 발휘되는 쾌락(세상이 말하는 쾌락이 아닌)과, 현실적 고통을 마주하지 못하게 하여 영혼이 본질에 가까워 지지 못하게 하라.

사탄은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지워버리고,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쾌락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인간 자아에 대한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하게 하며,
진정한 고통 = 현실적 어려움을 회피하게 하거나 부정하게 함으로써 고통의 근원은 알지 못한채 자기 연민에만 빠지게 만든다.


14번째 편지(진짜 겸손에 이르지 못하게 하라)
겸손이라고 하면 자신의 능력과 성격에 대해 낮은 평가를 갖는 것으로 착각하게 해서
사실은 자기 자신이 뛰어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부정하는 태도를 계속 취하게 하라.
진정한 겸손은 자기 자신을 아예 잊어버리는 무아지경에 상태에 이르러, 누군가를 사랑하고 세상을 편견없이 바라보며, 자신에 대해서도 온전하게 자기자신의 편견없이 바라보는 상태를 뜻한다.
그리하여, 자기자신을 비롯한 모든 자아를 향한 사랑과 감사에 이르게 되는데, 인간에게 자기 자신은 별볼일 없는 건축가나 시인으로 폄하하려고 애쓰느라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게 하여 진정한 겸손을 이루지 못하게 하라.(사실은 위대한 건축가나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겸손은 자기 자신을 편견없이 올바르게 볼때 겸손해 질 수 있는 첫걸음의 시작인데, 나만의 달란트가 있음을 알고, 또 나의 어둡고 더럽고 추악스러운 모습도 반드시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나의 빛과 어둠 이 두가지 양면성을 정확히 인지할때 나에 대한 편견없이 나를 마주할 수 있으며, 이 눈을 가지고 타인을 바라볼 수 있다.


15번째 편지(인간을 영원과 현재로부터 떠나게 만들자)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에, 자연스럽게 영원과 현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현재와 영원은 사실 분리되어 있다기 보다 연결되어 있는데, 현재는 영원에 가닿는 지점이자 시작점인 셈이다. 따라서 영원함이 현재와 분리되어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이미 영원히 살아가는 행위에 귀속된 것이다. 즉, 인간은 현재에 집중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런데,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려 하고, 미래에 소망과 두려움을 두지만 사실은 우리는 미래를 살 수 없다. 우리는 현재의 이 순간에만 자유와 현실성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미래를 살 순 없지만, 현실을 충실히 살아갈때 우리는 미래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사탄은 과거에 잘못과 과거의 사건에 인간의 마음을 가둬 과거에만 살아가게 하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헛된 소망과 마주하지 못할 두려움까지 안고 살길 바란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와 먼 미래에 대해 나의 마음을 두기보다 과거는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가까운 미래에 대해 어떤 일이라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며, 현재에 대해서는 다만 내일 실천해야할 정의나 자비의 행동을 계획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만큼만 생각하며, 내일의 일을 계획하는 것은 오늘의 의무로 삼고, 오늘 하루하루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만큼만 견딤을 구하고, 하루하루 일용한 양식으로 궁휼함을 베풀어 달라고 나아가야 한다.


16번째 편지(성도가 교회에 대한 감별사 내지 감정사가 되게 하라)
진정한 연합은 자신의 취향에만 맞는 모임안에서 이뤄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계급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성격이 달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연합할 줄 아는 모임이 진정한 연합이다.(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이 거리낌이 있는 사람들에게 양보하면, 거리낌 없는 사람들은 그 행위로 인해 스스로 구원받으며  충만해질 것이요. 거리낌 있는 자들에겐 은혜가 끼치게 되며, 거리낌 있는 자들은 자신도 거리낌 없는 자들처럼 될 수 있는 배움의 터안에서 성장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진셈이다.)

성도가 교회에 예배 방식, 전도 방식, 재정 계획 등에 대하여 어느정도 의견을 제시할 수 있으며 개선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 그치만, 그 정도가 지나쳐 교회 전체에 대하여 비평하거나, 판단만을 하게끔 하여 교회 안에서 배워야할 것들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비평과 판단만 남는다면 그것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간 셈이다.


17번째 편지(탐욕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영혼을 낚아라)
흔히 우리는 탐욕이라고  하면, 본인이 필요한 것 보다 많이 소유하거나, 많이 먹는 것을 탐욕이라고 생각하다. 하지만 사탄은 개인의 취향, 개인의 까다로움, 개인의 세부적인 요구사항을 충족하는 음식 또는 쾌락 또한 탐욕으로 규정하여,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허영심의 마음은 마치 탐욕스러운 마음이 아닌 것 처럼 위장하여 허영심은 사실 좋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탐욕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착각하게 한다. 즉 A, A’ 둘다 안좋은 건데 A에 대한 정의를 하나만 내리게 함으로써 A’는 마치 나쁜게 아닌 것 처럼 교란시킨다.


18번째 편지(진정한 사랑에 대한 의미를 왜곡시켜 온전한 사랑과 결혼생활을 못하게 한다)
만물은 여러 개인 동시에 하나이며, 하나인 동시에 여러개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롭고 협력해야하는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에 의미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것이 가족이며 가족 구성원은 제각각 독립적인 인간이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안에서 강한 책임감과 협력을 이끌어 내는 단체이며 유기체 그 자체이다. 즉, 가족을 통해 인간을 사랑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다.

우선, 가족을 구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남녀가 결혼을 하여 성교를 해야하는데 사탄은 가족을 구성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남녀가 꼭 성적인 부분에 대한 매료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사랑으로 인해 결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성교를 통한 섹슈얼적인 애정한에서만 결혼을 해야한다고 왜곡시킨다. 즉,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남자와 여자가 자신의 자아를 타자아에 맞게 희생하고 타자아를 나의 자아로 수중히 여기며 존중하는 그 모든것(=사랑)을 행하며 이루며 결혼을 하였고, 그 결혼의 결과로 한몸(=성교)이 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는데 마치 선물을 줘야 결혼을 하겠다고 인과관계를 뒤집어 놓는 전략을 취했다.

19번째 편지(사랑, 애국심, 독신생활 등 이런 주제에 대해 좋으냐, 나쁘냐로만 귀결시켜라)
누군가에게 독신의 삶이 그의 삶에 있어 더욱 유익일 수 있으며, 누군가에게 결혼의 삶이 유익할 수 있다. 허나, 인간들은 너무나도 이런 주제에 대해 그 한사람의 상황과 삶을 고려하지 않고 좋다. 나쁘다. 그러하니, 좋은 것을 택하라고 압박을 가하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는 죄를 짓게 된다.

가령,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에 대해 하찮게 여기면서 교만을 취하는 인간에게는 사랑, 애국심 등에 대한 주제에 대해 냉소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사고를 주입시켜 망가지게 하고

반대로 감정적이고 잘 속는 인간에겐 구식 삼류 소설가의 작품을 인용해 ‘사랑' 이란 저항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만 믿게하여, 결혼을 했지만 ‘사랑'이란 이유로 죄를 짓는건 아니라고 하면서 외도를 하게 부추기거나, 결혼의 삶을 깨트리게 만든다.


20번째 편지(올바르지 못한 이성관을 갖게하여, 정상적인 이성교제를 못하게 한다)
인간의 관능을 광고, 마케팅, 삼류소설 등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시대에 맞춰 자극하게 만들고 그 결과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이성에 대한 이상형을 추구하게 한다.

이로 인해, 현실에 존재하는 이성을 교제하는데 항상 부족한 이성을 보는 것 처럼 환상을 씌운다.

한편, 인간의 본능 중 순수악을 추구하거나 관능 자체를 즐기는 행위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관계속 느끼는 감정을 마치 사랑은 막을 수 없다는 식의 사고를 통해 육체를 더럽히는 이성을 만나게하고 인간을 타락시킨다.


21번째 편지(인생의 주인을 ‘나’라고 생각하게 하여 멸망하게 하라)
사탄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돈, 자연, 나의 육신, 나의 생각들…이 모든 것의 주인을 ’나‘ 라고 생각하게 하여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닌 이 모든 것을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하여 멸망시키게 한다.

데카르트가 말한 유명한 말도 이와 같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데카르트

이 유명한 명제는 내가 생각해서 존재가 창조되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했더니 내가 생기더라고 이야기 한 것도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보니, 내가 있더라. 라는 말이다.

즉, 인간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인간 뒤에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은 우리는 영적존재들이 있다고 하며 누군가는 이를 느끼고 누군가는 이를 느끼지 못하며 인생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인데, 사탄을 이 사실을 인간들이 절대 모르기를 바란다.


22번째 편지
음악과 침묵 vs 욕망과 소음


23번째 편지
단 하나의 역사적 사실(부활)과 단 하나의 신학적 교리(구속)만으로 회심했으나,
지금은 역사적 관점을 이용해서, 예수를 위대한 위인이자 스승으로 전락시킨다.
또한,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믿게 만든다.


24번째 편지
신자들의 자긍심을 이용하여, 신자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불신자에 대한 반감과 편가르기를 만든다.


25번째 편지
관점에 따라, 다른데 같고, 같은데 변하는 그런 쾌감과 황홀감을 우리에게 선사했지만
악의 영들은 끊임 없이 우리에게 변화만을 추구하게 하여, 본질의 궤도에서 벗어나게 한다.


26번째 편지
타자의 유익이 곧 행복이고, 그 진정한 행복을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닌 나의 자아가 이기적이기 않기 위함으로 행하도록 왜곡시켜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게 한다.
진짜 이기주의보다 정교하고, 자의식이 강한 비이기주의가 전략적으로 사용된다


27번째 편지
그 기도가 영적이든, 영적이지 않든 계속해서 순종하고 기도하는 경우, 기도 자체가 필요 없음을 느끼게 하기 위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은 없다라고 치부해버리고, 기도가 이루어지면 기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게 아닌 다른 여타 수많은 이유를 들먹이면서 결국 기도 없이도 이루어졌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미래확정론의 배경에는 사실…
→ 신이 인간과 같이 시간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관점도 같을 것이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같지 않다고 생각해도 신이 시간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관점을 인간이 이해할리 없음

하지만, 미래확정론이 아닌 우리의 자유의지로 인해 현재 세계를 이끌어 가는 것인데도 말이다.

사실 인간에게 정확하게 미래란 시간은 개념일뿐, 인간은 오로지 현재에만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시간과 공간의 매 지점에서 창조 전체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모른다. 총체적이며 내적 일관성이 있는 창조행위인데, 인간은 단순히 일련의 연속적 사건으로 밖에 경험할 수 없다. (주식 그래프와 흡사하다)

그러면서 과거에 누군가 진리를 말했을때 그것이 정말 사실인지에 대한 물음보다, 본질과 벗어난 피상적 질문들을 하게끔 유도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한다. 왜냐…진리를 정말 알게되는 그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원천이며,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보이티우스 (6세기 로마철학자,천문학자)의 폭로 - 철학의 위안 275~276p 일부 발췌
인간에게는 의지의 자유가 신의 예지에 의해 훼손됨 이 없이 고스란히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필연성으로 부터 벗어나 있는 인간의 의지에 상이나 벌을 부과하 는 법은 부당하지 않다. 또한, 신은 저 높은 곳에서 내 려다보고서 모든 것을 미리 아는 관찰자에 늘 머물러 있기 때문에, 신이 영원 안에서 모든 것을 현재적으로 보고 있는 것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어떻 게 행하느냐에 따라 선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을 받 을 수도 있고 악인들에게 주어지는 형벌을 받을 수도 있는 가능성은 서로 공존한다. 따라서 우리가 신에게 드리는 희구와 간구도 헛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올바르게 드려지기만 한다면 반드시 효력이 있 다.
그러므로 너희는 악을 멀리하고 미덕을 기르며, 바른 희망을 품고서 너희의 정신을 들어올려서 저 높은 곳 을 바라보고 겸손하게 간구를 드리라. 너희는 모든 것 을 보고 있는 심판주의 눈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기 때문에, 너희 자신을 속이고자 하지만 않는다면, 바 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필여성이 너의에게 주어져 있다 는 것을 알 것이다



28번째 편지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게 한다. (어느 상황속에서도 천국소망을 가지고, 만족하는 마인드를 말하는게 아니라 영원하지 않는 것들은 영원한 것 처럼 대하고 살아가는 마인드를 뜻함)
죽음은 최악, 생존은 최선으로 생각하게 한다. 본향이 이곳이라 착각하게 한다.
가까오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더더욱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하는데 분별이니 성숙이니 경험따위 말로 죽음의 중요성과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킨다.


29번째 편지
인간이 참으로 자신을 알게되고 혐오하게 됨으로써 진정한 회개와 겸손으로 들어서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
절망을 일으키는 죄보다는 절망 그 자체가 더 큰 죄이다..



30번째 편지(실체를 교란시키면서, 진짜를 가짜로..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킨다.)
‘실체' 라는 정의는 크게 2가지를 뜻한다. 물리적인 사실 그리고 의식에 끼친 영향이다.

예를 들어, 출산 할때 산모는 생명의 리스크를 안고 큰 고통을 감당해야하는 것은 물리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출산의 진정한 실체는 의식에 끼친 영향이 더 큰데 세상보다 귀한 하나의 영혼을 품은 새생명이 탄생하는 놀라운 일이며, 그 생명이 가져다주는 영적 충만함과 행복은 풍성하다. 하지만 사탄은 출산은 고통이며, 나의 이익을 희생해야하고 나눠야하는 일로써만 실체를 보여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정말 실체인것마냥 착각을 일으킨다. 전쟁으로 인하여, 내장이 튀어나오고 온통 피 범벅에 미동도 없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물리적 실체를 보며 우리는 ‘신은 없다’. 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도 이와 동일한 전략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것을 물리적인 사실로만 이해하고 물리적인 사실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그 이상의 진정한 실체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가령 ‘사랑', ‘인내', ‘배려', ‘용서', ‘포용' 이라는 가치는 물리적인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물리적 사실 이상의 가치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을 통해 영성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지. 이성에 끝에 머물러 있으며 안된다. 이성 너머의 영적 세계와 영적 가치가 실은 이 세상을 주도하고 이끌어 가는 실체이다. (전쟁이 왜 났을까? 생각해보아라. 정치적인 이익, 국가의 이익, 또는 권력자의 이익을 위해 전쟁은 일어난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죽이면서까지 왜 그토록 이익을 추구할까? 그 인간들은 악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만큼의 양보다 더 많은 것을, 더 자극적이고, 더 쾌락적이고, 더 자신의 뱃속을 채워야 하는 영적 타락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즉 포탄을 맞아 내장이 튀어나온 것은 전쟁의 참혹한 결과이지, 진짜 이 전쟁의 시발점이자 촉발점이 된 실체는 인간의 영적 타락이다. 그런데 사탄은 영적인 이 문제에 대해 물리적인 사실에만 집중하게 하여 영적 세계는 없다고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우습고 교묘한가.)


31번째 편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 세계의 삶의 시작이자 탄생이다.

죽기 전의 삶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을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다. 동시에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연습하는 시간이다. 그 결실이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옛 선조들은 죽음을 표현할때 돌아가신다. 라고 표현했는데 마치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본향이 아닌 것처럼 표현하는 말이다. 즉, 이 지구라는 공간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다. 타향이다. 죽음은 우리가 타향살이를 끝내고 본향으로 가는 것을 뜻한다. 또한 죽음은 하나님의 실체를 마주하는 황홀경의 순간이다. 우리가 느꼈던 고통과 쾌락이 유한한 가치를 뛰어넘는 세계로 가는 순간이다.

그러니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성경에 두려워 말라라는 말은 366번 기록되어 있다). 죽음은 축복된 세계의 시작이다.


-마치는 기도
이세상은 눈으로 보이는 육의 세계를 너머 영의 세계가 있음을 다시한번 알게 한다..

또한, 영의 세계는 지금도 치열한 전쟁 중이다.

아예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와, 알았다 셈 치더라도 어설프게 앎으로 빚어진 오해를 통해 진리를 모르게 하는 지금도 치열하게 전쟁 중인 영적 싸움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통해 승리할 수 있게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또,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높혀 오해를 줄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우리의 지성과 영성을 깨워야 한다.

또한 영적 싸움은 언어와 생각과 사고의 싸움인 것 같다.

또한 논리의 싸움 로직의 싸움 같다.

한편, 악의 영들은 우숩다.

결국 그들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리고, 창조물은 창조된 세계안에서 왜곡하고, 비틀고, 오해를 낳게할 뿐 어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 그리고 악의 영들 또한 잘 알진 못하지만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더 크신 계획 보다 더 큰 계획에 악의 영에 대한 구원 또한 있으리라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한다.

현재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자유의지로 매 순간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게 도움과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하며, 미래를 예비하신 것을 확정된 운명처럼 착각하지 않고, 수현실을 올바르게 살아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열심에 소훌함이 없게 하여, 우리가 그때 그때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기도가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자.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