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들어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죽음의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언어 또한 이 두 침묵의 세계 사이에 살고 있다.
그렇게 인간의 언어는 두 세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순결함과 소박함과 원초성의 말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으로부터 얻는다. (굳이 말하자면 생명이 태동한 침묵)
그러나 미미한 지속성, 덧없는 사라짐, 허약함 그리고 말이 자신이 명명하는 사물들과 결코 완전하게 일치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두번째 침묵
즉, 죽음으로 부터 온다.
특히, 장 파울의 언어에서 이 두세계의 자취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순결하고, 원초적임과 동시에 작별의 채비와 덧없은 사라짐을 위한 것이....
하지만, 오늘날 말은 두 세계의 침묵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의 말은 소음에서 생겨나서 소음 속으로 사라진다.
오늘날 침묵은 더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침묵은 다만 아직 소음이 뚫고 들어가지 않은 곳일 뿐이다. 그것은 단순히 소음의 중지일 뿐이다.
이제는 더 이상 여기에 말이 있고 저기에 침묵이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에 말해지는 말이 있고, 저기에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이 있을 뿐이다.
언어 속에는 또 하나의 침묵,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침묵도 없다.
오늘날에는 진정한 죽음이 없는 까닭이다.
오늘날 죽음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수동적인 어떤 것일 뿐이다.
즉 생명이라고 불리는 것의 중지, 그 최후의 끝일 뿐이다.
다 비워버린 생명 그것이 오늘날의 죽음이다. 죽음 자체가 그렇게 죽음을 당했다.
-침묵의 세계 中-
즉, 우리는 어느순간부터 생명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사니까 살아가고, 사는대로 살아가는 이도저도 아닌
아니 어쩌면 이도저도 인지조차 모르는 수다 자체의 모습으로 소음처럼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우리는 생명 또는 죽음 중 최소 하나엔 붙어 있거나 그 중 하나엔 스스로 자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에서 오직 한 번 죽는다. 그리고 죽음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실패한다. 죽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미 죽음에 임했던 경험 많은 사람들의 지침에 따라서 죽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금욕은 우리에게 이러한 죽음 체험을 준다" (플로렌스키)
금욕은 비록 살아있으나 우리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죽음과 비슷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나의 욕대로 살지 않은 상태…즉 내가 죽은 상태여야지 오히려 삶(생명과 죽음)에서 성공할 수 있는 모순이 숨겨져 있다.
성경에서는…
한번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느니라 고하셨습니다. 즉 내 안에 내가 정말 죽고 다시 태어나야지 예수님을 진정 따라가고, 유업을 받을 수 있다 하십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신 것이라.
내가 죽는것만큼 내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고 그리스도께서 연사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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