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영혼에 대한 생각들...

벌거벗은 운명을 무엇으로 덮는가(창세기, 선악과, 부끄러움)

Lim-Ky 2025. 1. 18.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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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 벗었지만 부끄럽지 않은 온전한 인간(원초적이며, 근원적인 상태의 인간)

창세기 2 장 19절 KRV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세기 2장 25절 KRV
[25]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태초에 창조된 인간은 온전한 육신과 살아있는 영을 지닌 존재였다. 아담은 사물들을 어떠한 왜곡 없이 온전히 바라보며 그 사물을 명명하는대로 사물의 정의가 이루어졌다. 또한, 모든 기준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며,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하고 교통하는 관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였다. 아담의 자아는 온전히 하나님의 자아로 위탁되어 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덮어져있는 상태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담과 하와는 자기 자신이 벌거벗어져있는 상태여도 둘다 판단할 밝은 눈(기준)이 없기에 자신들이 벌거 벗은 상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며, 벌거벗음을 판단할 수 있는 존재(타자)가 말해주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다. 즉, 아담과 하와에겐 벌거벗음 따윈 중요한 일이 아니며 중요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한편 벌거벗음은 ‘아무것도 없다’는 근원적인 의미로도 다가오는데 이런 소유의 관점으로 본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없어도,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내가 수고를 하고, 돈을 많이 벌고, 타인의 눈치를 보며 잘보이거나,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거나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의 존재만으로도 심히 기뻐하셨으며, 생육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거저주셨다.

우리는 원래 존재자체만으로 사랑받는 존재였다. 아무것도 없어도 나의 존재만으로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친히 나와 대화하시고, 나를 위해 지어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는 역할도 주시며 ‘나’라는 존재를 축복하셨다.


벌거 벗었음 알게된 인간은 부끄럽고, 두렵고, 숨었다 (죄인된 인간의 삶)

창세기 3장 6절 - 11절 KRV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하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생각하였다. 실은 지혜있는자가 선악을 취급할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현대인들이 물질을 다스리고,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물질을 얻고자 물질을 추구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끝끝내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음으로써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졌고, 눈이 밝아지자마자 처음 느꼈던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영적인 상태에 대한 부끄러움인데, 옳고 그름의 문제에 대해 옳지 못한 행위를 했을때, 옳은 행위를 할 수 있음에도 그른 행동을 했을 때 오는 그 죄책감과 수치스러움을 뜻한다. 우리는 이것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을 우리가 갖게 된 것이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인간은 선악과를 먹기전 피아노 건반도 모르고 악보도 몰라도 베토벤이 완벽하게 연주하는 교향곡 5번을 들으며 편안한 의자에 앉아 감상하고, 감상평을 실제 베토벤과 이야기하는 즐거운 시간들의 연속이었으나,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베토벤 교향곡 5번 악보를 완벽히 외우고 이해해서 수많은 관중 앞에 매순간 건반을 쳐야하는 운명에 빠진 3살짜리 피아니스트가 된 것과 다름 없다.

다시 말해, 선악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지혜'로 부터 나오는데, 인간은 그런 ‘지혜'를 스스로 발휘할 능력이 없는 존재였다.(하나님께 판단 기준을 묻고 행해야 가장 올바른 결과가 도출) 그런데 스스로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담과 하와에게 너가 벌거벗어져있는 상태라고 고발하거나 인간 스스로가 감당 못할 선악의 판단 기준을을 가지게 되었음을 내포한다.(그래서 11장에선 하나님께서 누가 네게 벗었음을 알려주었는지, 아니면 너가 선악과를 먹었는지 묻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충격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선악의 판단기준을 인간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밝은 눈은 떠졌으나, 영적인 눈은 감겼으며 오히려 맹인되어 사물을 온전히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며 인간 스스로가 인간이 창조하지 않은 온 만물을 하나님의 설명과 가르침 없이 내가 이해하고 깨닫고 선악을 판단하겠다고 뛰어는 행위이다. 즉, 우리 모두가 신이 되었다.

스스로 신이 된 인간은 절대적인 기준 없이 온전히 자신만의 눈으로 상대적 기준을 가지고 타자를 평가하며 심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인간들은 서로 오해를 낳고,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미워하고,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살인하고, 다투며, 분쟁을 일으키며, 분열되고, 혼란스럽고, 전쟁이 나며 인간이 주인됨에 따른 비극이 펼쳐진다.

창세기 4장 7절 - 9절 KRV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렇게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된, 심판자가 된 인간은 이제 더 나아가 부끄러움에 대해 부끄러워 하지도 않는다. 가인은 자신의 형제 아벨을 죽여놓고, 자신이 아벨을 죽였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물으메 모른다고 거짓을 고하며, 회피하고 오히려 아벨을 내가 지키는자이냐고 대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창세기 4장 23절 KRV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자신의 욕망과 탐심으로 인해 아내를 둘이나 둔다. 최초의 일부다처제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두 아내에게 자랑하듯 자신에게 상처를 준 어떤 소년을 살인했다고 말하며, 가인의 벌보다 자신의 벌이 더 크다라고 자랑하듯 말한다. 요약하면, 인간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완전한 상태였는데, 선/악 판단하는 기준이 생김으로 인해, 악을 행할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않으며 부끄러움을 오히려 자랑하는 패역하는 세대의 인간으로 추락하게 된다.


부끄러움을 무엇으로 덮는가.

창세기 3장 7절 - 11절 KRV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세기 3장 21절 KRV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런 비극을 알기라도 한건가? 아담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이 부끄러움(필멸할 운명) 앞에(죄인으로써 느끼는 감정) 두려움으로 반응하며, 급기야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움을 감추려들며 하나님을 피해 숨는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면하기 꺼려한다.

우리에게 무화과나무 잎은 무엇인가. 돈(물질)인가? 좋은 집인가? 성공한 사업가? 직장에서 인정받는 것? 가족? 권력? 명예?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관? 과학? 뉴에이지? 이성? 사탄과 세상은 이런 것들로 부끄러움을 감추라고(실은 감출수도 없다) 세뇌시킨다. 세상이 주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은 근원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세상이 '악'으로 판치는 이유가 바로 증거이다. 하나님이 세상의 목적을 '악'으로 창조하지 않았다. 우리 인간이 모두 각자 자신의 소견대로 자신만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재단한 결과이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스스로 신이 되고, 스스로 책임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만가지의 혼돈과 혼란의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는 누군가의 댓가 없이(생명의 희생) 덮어질 수 없는 것임을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최초의 살생을 통하여 인간에게 임시로 가죽 옷을 입히시고, 우리의 죄를 덮기 위해선 반드시 생명의 희생(댓가)이 따른다는 이치를 알게하신다.


그리스도로 덮으라.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시어 자기 희생을 통해 스스로 인간의 영원한 가죽 옷이 된다. 벌거벗어서 이 어찌할바를 몰라 아무렇게나 부끄러움을 가리우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사랑 그 자체)을 덮으라 하시고 모든 피(생명의 상징)를 쏟아내시어 보혈로 우릴 감싸주신다. 다시 말해, 세상 어떤 것도 이 부끄러움을 가릴수조차 없다. 결국 우리는 벌거벗어짐을 알아야한다. 부끄러움을 가렸던 세상적 향수를 던져버리고, 우리 자신이 벌거벗어져있는 운명임을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로 우리를 감싸달라 하나님께 간구하고 용서를 구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6장 26절 - 28절 KRV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인류의 죄를 보시고, 살생을 하여 가죽옷을 입힌 사건이 곧 예수님이 자신이 될거라 말씀하시면서, 인류의 죄사함을 위하여 자신이 죽을거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실로 말도 안되는 가장 모순적인일인데, 신이 자신이 창조한 창조물을 위하여 죽으시는 사건이다 이것은 그 어느 종교에서도 없는 가장 충격적인 일인데, 당시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인간은 나체인 상태로 군중들 앞에 못박혀 온갖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당해야만 했고, 바로 죽지 않아 못박힌 상흔으로 부터 피가 줄줄 쏟아지는…그리고 그 시체는 들짐승들에게 던져지는 처형방식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너희의 부끄러움을 나의 부끄러움으로 바꾸시고, 내가 너희를 위해 댓가를 치를 것이니 너희는 이 사실을 기억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예수님이 나의 부끄러움으로 위해 죽으시는 사건을 믿음으로 묵도하며 이제 더 이상 너희가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이미 회복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너희는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와서 하나님의 주인되신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서신에도 명확히 나와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KRV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장 11절 KRV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글을 마치며…태초의 선악과의 사건을 통해 ‘부끄러움'을 키워드로 우리의 삶을 진단하고, 우리가 해야할 것에 대해 다시금 조명해보았다. 누군가는 고난이 오기 전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한다. 또 누군가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마주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죽을때까지 알지 못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지금 다시 선택의 기로 앞에 놓여진 것이다. 날마다 매일매일 당신은 당신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부끄러움을 느껴 세상이 말하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 있는가. 아니면 두려움에 숨고 그저 도망쳤는가. 오늘 성경에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다. "나의 피와 살을 먹어라. 세상이 아닌 '나(하나님)'를 통하여 너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나와 동행하자고 말이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 KRV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요한계시록 3장 5절 KRV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https://youtu.be/z9vl2U-iBf4?si=CamxYOK9kI3OpH8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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