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문명,인간의 Entropy(엔트로피)
자연법칙에서의 Entropy
물체의 열적 상태를 나타내는 물리량의 하나로 흔히 일반인들에게 무질서도(無秩序度)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통계역학으로 엔트로피가 미시상태의 수에 대응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엔트로피에 대해 기술한 것이 열역학 제2법칙이며, 자연현상의 물질의 상태 또는 에너지 변화의 방향을 설명해 준다.
엔트로피는 '무질서'의 척도로 흔히 이해되는데, 무질서는 굉장히 다양한 뜻을 담고 있으며 엔트로피 이해에 모호함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에 21세기에 발행되는 책에서는 그와 같은 표현을 지양한다. 엔트로피의 증가에 대한 해석은 균질화의 과정이나 평형으로의 이동을 사용하여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기존처럼 무질서도로 엔트로피를 이해해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닌데, 이는 무질서도와 균질도가 어느 정도 대응되기 때문이다. 인간 본위의 관점을 떨치고 보았을 때, 전 우주에서 부분 부분으로 뭉쳐있는 에너지가 전체에 걸쳐 평평하게 흩어져가는 과정이 엔트로피의 증가 과정이다. 즉, 엔트로피의 증가는 평형 상태로의 이동이며 에너지적으로 볼 때는 안정화되는 방향이다. -나무위키 발췌-
에너지 관점에서 엔트로피 증가(뜨거운 물이 서서히 식는 것, 기체가 퍼지는 것)는 안정화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어떠한 외부 간섭 없이 순수한 환경에서 뜨거운 물이 미지근해지고 활발한 기체가 점차 퍼지는 현상은 이상한 게 아니다.
Entropy 지수를 낮추는 방법(역행하는 방법)
그런데 만약, 차가운 물을 다시 뜨겁게 하거나 특정 공간이 기체를 다시 활발하게 하려면 외부로부터 반드시 어떤 물리적인 '힘'(열)을 가해야 한다. 이 물리적인 '힘'을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힘'을 만들어 내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에너지는 공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일'이란 것을 해야 하며 '일'을 하기 위해선 '수고‘해야 한다.
가령 손바닥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왼손, 오른손의 힘을 써서 손바닥을 서로 비비는 행위, 내가 조금 더 빠르게 가기 위해서 다리에 힘을 주고 뛰는 행위들이 그런 것이다. 즉,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에서 엔트로피가 낮은 생태로 만들기 위해선 우리는 수고(受苦 : 일 하느라 힘을 들이고 애를 씀) 해야 한다.
'수고'의 어원은 '고통'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수고'라는 것인데, 한자대로 해석하면 '수고'는 '고통을 받는다'가 된다. 석보상절 등 중세 한국어 문헌에서는 단어 그대로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쓰였지만, 점차 '애쓰다'에 가깝게 의미가 변화하게 되었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일을 마치고 나서 동료에게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세요' 등의 인사말을 사용하곤 한다. 온라인상에서는 초성만 남겨 'ㅅㄱ'라고 쓰기도 한다. -나무위키 발췌-
어원으로만 따진다면 우리는 매일 퇴근하면서, 인사말로 사용했던 "수고하세요"는 사실은 고통받으세요. 힘들게 일하세요.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게 자연스러운 자연법칙에서 우리가 엔트로피를 낮추기 위한 역행을 하려면 반드시 '고통'이 수반되며 '노력'(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힘쓰는 것. 또는, 그렇게 쓴 힘)이 필연적이다.
문명적(사회적) Entropy
이런 엔트로피 법칙을 '인간과 문명'에 적용해서 사회를 종종 설명하기도 하는데, 누군가는 "현재 문명은 점차 엔트로피를 높이고 있다."주장하며 누군가는 "엔트로피를 낮추고 있다."라고 말한다.
내가 이해하기론, 사회가 발달될수록 사회 현상은 복잡해지고 사회 구성원의 의견과 주장은 다양화되며, 이 복잡함과 다양함은 무질서를 증가시키기 때문에, 사실 문명이 하는 일이란 엔트로피를 낮추는 게 아니고 필연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명이 고도화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면 지금보다 무질서한 상태(즉 자연적 상태, 날것의 상태)에서 경계를 나누고, 시스템이란 걸 구축하기도 하며 자연으로부터 완벽하지 않지만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해 주었다는 관점에서 엔트로피를 낮추었다고 생각한다.
즉,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편리한 삶을 영위할 목적하에 복잡하지만 나름 무질서에서 질서를 갖춘 안락함을 선사하였고, 지금의 문명은 엔트로피 지수를 낮춘 사회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
Entropy가 낮은 문명에서 산다는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인간의 삶은 한편으론 굉장히 피곤하다. 문명은 끊임없이 복잡함을 야기하며, 그로 인해 새로운 것들을 탄생시키기 때문에 고도화된 문명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복잡함을 인지해야 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하며, 새로운 도구들을 사용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만약, 개인이 고도화된 문명에서 요구하는 수준까지 엔트로피 지수를 낮추지 못하면 개인은 결국 문명에 휩쓸리는 문명의 '노예'가 될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고도화된 문명에서 최고의 발명품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이다. 이것들은 정말이지 최소한의 노력(고통)만 지불하면, 어마무시한 정보와 편리함(이익)을 인간들에게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효율의 극대화는 긍정적인 면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최소한의 노력(고통)으로 거의 떠먹여 주다시피 한 정보(이익)는 우리에게 생각의 힘을 키울 기회를 점차 없애고, 왜 고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빵만 주면 되지 눈물까지 흘리면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한다. 이런 종속상태(노예와 같은)가 장기화되면 결국엔 엔트로피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한한 천국을 만들어 달라고 떼쓰는 인간들로 전락하게 만드는 것이다.
Entropy 낮은 문명에서 살기 위해 우리는 '수고'해야 한다.
엔트로피가 낮은 문명에서 살기 위해선, 엔트로피를 지속적으로 낮추는 훈련을 해야 한다.
1. 매일 뛰기 또는 운동하기
2. 독서하기
3. 찬물로 샤워하기
4. 공부하기
등등
위 행위들은 단기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기간 꾸준히 수행하면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얻은 도파민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하며, 심지어 이 도파민은 우리가 과정 중에 얻은 '고통'을 성공경험으로 대체시켜 버리는 힘까지 있다.(가장 쉬운 노력으로 도파민을 최고치로 스파크 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마약'이다. 그래서 '마약'을 하고 난 이후에 삶은 모든 것이 시시하며, 노력과 수고를 통해 열매를 먹어야 하는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엔트로피를 의도적으로 낮추는 행위를 꾸준히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문명 안에서도 차이가 난다. 누군가는 문명을 만들어가고, 누군가는 문명에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엔트로피를 낮추긴 싫은데, 엔트로피가 낮은 사회에서 살고 싶다면 '노예'로 살면 되고 엔트로피가 높은 사회에서 살고자 하면 아프리카나 산속 같은 자연환경에서 하루하루 욕심 없이 살아가면 된다.
인간(본질)적으로 Entropy가 높아진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이번엔 문명이 아닌 인간에게 엔트로피가 어떻게 적용될지 생각해 보자. 인간을 자연 그대로 가만히 둔다면, 인간은 과연 자유의지로 무엇을 할까 인간은 100이면 100 '본성'과'본능'대로 살아갈 것이다.
단순하게, 이 세상에 '법'이란 게 없고 '기준'이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쉽다. 무질서가 판을 칠 것이다. 심지어 '법'과 '기준'이 있음에도 세상은 무질서하며 지금도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가는 게 현실이다. 즉, 인간을 자연 상태 그대로 둔다면 인간은 '본성'과 '본능'대로 살 것이며 그 결과, 쾌락을 추구하고 자신의 욕심대로 취하며 결국 타락한 삶을 살 것이다.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정확하게는 인간은 태초에 악한 존재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지만 특별히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의지로 '선'을 행하지(신을 거역) 않음으로 '악'이 우리 안에 들어왔음에,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도 이따금씩 이루지만, 외부의 간섭 없이는 반드시 '악'을 저지르며 '악'에 지배당한다.
Entropy가 높아지는 곳에서 우리는 역행해야 한다. (죽음 가운데 역행하는 것)
유대인들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어떤 역경에도 '성공'하는 자가 많다고 한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유대인들의 특별한 교육법이 있는데 바로 고통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중고등학교 때 의무적으로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를 방문해야 한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가슴 아픈 고통의 역사를 배우고 체험하며, 현재의 삶은 고통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다. 이 경험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삶에 대한 감사함으로 열심을 다해 살아갈 이유와 원동력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 고통의 가르침을
전지구적으로,
인류적으로,
인간본질적으로 깊게 확장해 보자.
태초 인간에게 '죄'라는 것이 들어와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2천 년 전 Entropy 역행의 극치이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관성을 한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정지시키고, 인간을 본래의 창조 목적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역행의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역행은 너무나도 대가(수고=고통)가 큰 것이어서 인류가 감당할 수 없었고, '그'가 침묵 가운데 직접 오셔서 인류에게 대신 죽임 당한다.
이 사건은 ‘고통'의 극치이자 '사랑'의 극치이며 우리가 감히 감당치 못하는 역행인 '십자가 사건'이다.
그가 증명하듯, 우리의 죄는 절대로 고통 없이 또는 대가 없이 값을 치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유한한 땅에 살아가면서, 이 땅을 천국과 같게 만들어 달라고, 아니 나의 삶을 형통하게만 해달라는 것은 마치 하나님을 알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신이 아니어서 물질만 주는 신을 만들어 우상숭배했던 구약의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물론 이 땅에 살면서 물질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성숙한 신앙을 갖기 위해선 그의 역행에 더 주목해야 한다.
세상이 나를 증오하고 핍박하여도, 끝까지 그의 말씀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게 해달라고 소망해야 한다. 주를 믿음으로 오는 고난과 고통을 기뻐 받아야 한다.
그때야말로 그의 십자가를 나 또한 지는 것이며, 그의 '역행'의 위대한 역사를 내가 다시 이어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며 고난 가운데 그가 역사하심을 알고, 그가 나로 하여금 나를 '작은 예수'되게 하여, 이 땅 가운데 한 알의 밀알로 거룩한 희생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